아름다운 일상/여행 이야기

가야산 해인사

장준혁한의원 2014. 2. 13. 16:38

 

굳이 사찰을 찾지 않고 특별한 불심이 없이 다만 이름난 산과 계곡을 찾아가 한때의 즐거운 시간만을 갖고 싶어하더라도 틀림없이 그 곳에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옛 사람들의 선견지명에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경험을 한 적이 많이 있다.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따라 거창과 고령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은 맑은 물과 우거진 소나무로 특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세를 지니고 있다.

紅流라는 이름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붉은 물이 흐른다는 뜻이 되는데 실제 계곡의 물은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니 아마도 가을날 붉은 단풍이 비치는 물을 보고 상상력이 뛰어난 어떤 분이 붙인 이름인 듯 하다.

이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계곡의 끝에는 역시 웅장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법보사찰로 유명한 해인사다.

매표소를 지나 올라가면 가야산 해인사라는 단정한 글씨가 쓰여진 일주문을 만나게 되는데 숙연한 마음으로 이곳을 들어서면 벌써 불어오는 바람이 다르게 느껴지니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예민한지 알 수가 없다.

일주문을 지나 훤칠한 길을 따라 구광루를 올라가면 바로 법당인 대적광전을 만나게 된다.

들어가 참배하고 봉안된 불상을 살펴보니 짧은 지식으로는 여러 불상중에 비로자나불만 간신히 알 수 있을 뿐이다.

보통의 사찰에서는 대웅전으로 적힌 곳이 대적광전으로 적힌 이유가 궁금하지만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어 잠깐의 의심으로 지나고 만다.

대적광전 뒤로는 8만 4천 법문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장경각이 깨끗하고 정숙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명부전, 응향각, 응진전, 삼성각등의 당우(堂宇)들이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깨끗하게 쓸려진 마당과 어울려 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법보가람으로서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해인사 내에는 수많은 암자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해인사를 둘러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홍제암과 백련암으로 해인사 서쪽편으로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있는 홍제암은 임진왜란시의 행적으로 잘 알려진 사명대사가 입적하신 곳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지은 비문이 있는데 이 비문은 일제시대에 합천경찰서장에 의해 4조각으로 깨지는 수난을 당했다 하니 새삼 일본인의 만행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백련암은 해인사에서 가장 멀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암자로 많은 고승들께서 계시던 곳이고 얼마전 입적하신 성철스님께서 계시던 곳이니 빼놓을 수 없다.

또 해인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팔만대장경이 있다는 것이지만 팔만대장경에 관한 나의 지식은 고려시절 몽고의 침입을 불법에 의존해서 물리치기 위해 만든 기막힌(?) 노력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사실 뿐이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팔만대장경에 대해서 배울때 떠오르던 의문이 다시 되살아난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총 · 칼을 만드는 대신에 팔만대장경을 한 획 · 한 자씩 판각하는 엄청난 노력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그 정성에 감복해야 할 것인가 ? 아니면 그 무지할 정도의 순수함에 어이없어 해야 하는가 ?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절의 고통과 피폐속에서 기울인 정열과 노력이 현재에 와서 세계적인 법보를 우리에게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인사에 와서도 팔만대장경은 장경각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역사시간에는 대장경의 문화적 가치보다 전쟁의 유물로, 실제 여행에서는 감히 친견하지 못하는 보물로 팔만대장경은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하지만 해인사가 법보종찰로 불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고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으로 전 세계적인 보물이라는 사실로 볼 때 해인사가 얼마나 복받은 명찰인가는 잘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해인사에는 원당암 석탑과 원경왕사비 같은 많은 보물급 유물들이 있지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해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면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의상법사의 법손이신 순응스님이 창건하는데 성목태후가 불사를 크게 도왔고 그 후에 이정스님이 뒤를 이어 이 절을 크게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신라말의 대학자이신 고운 최치원 선생이 머물러 계시던 학사대가 있고 친히 심으셨다는 천년된 전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이 곳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해인사의 내력에서 알 수 있듯이 해인사를 처음 창건하신 순응스님이 의상대사의 법손이라 하고 의상대사는 원효대사와 헤어져 홀로 중국에 들어가 화엄사상을 가져오신 분이니 가야산에 절을 짓고 해인사라 명명했던 이유는 아마도 화엄사상을 널리 펴고자 함이었으리라.

『해인』이란 절의 명칭도 화엄경의 “해인삼매”라는 삼매경지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니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이라는 이 절의 명칭에 응결되어 있다고 하겠다.

내가 어떻게 심오한 화엄사상을 알 수 있을까마는 다만 천여년전에 이렇게 큰 절을 세우고 자기가 가진 사상으로 세상을 구제하려했던 옛 분의 그 넓고 깊고 큰 서원을 생각해보면 자못 감동적이다.

파도가 잠든 바다에 삼라만상이 제 본모습을 찍듯이 마음의 바다에 파도가 잠들어 모든 것이 참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해인』의 경지는 과연 어떤 것인가 ?

해인사 경내에 자리한 불교용품 판매점에서 성철스님의 법어집을 구해 읽거나 해인사의 청아한 모습이 담긴 엽서를 사서 진정한 마음의 소리를 적어본다면 더욱 감동적인 해인사 순례가 될 것이다.